기본소득, 여가 늘고 노동 줄어… 현금성 복지의 빛과 그림자

 



최근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Basic Income)**에 대한 논의가 다시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일정한 현금을 조건 없이 지급하는 이 제도는, 빈곤 문제와 불평등을 완화하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대안으로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실제 실험 결과를 놓고 보면 기대와 달리 여러 가지 한계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20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학자대회(ESWC)**에서는 최근 3년간 진행된 다양한 기본소득·현금 지원 실험의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특히 오픈 AI의 샘 올트먼(Sham Altman) 최고경영자가 주도한 미국 실험과 서울시의 ‘디딤돌 소득’, 파키스탄 펀자브 지역에서의 현금 지원 연구가 나란히 소개되며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 실험들의 구체적 결과와 시사점을 살펴보겠습니다.


미국 기본소득 실험: “노동 줄고 여가 늘어”

오픈리서치(OpenResearch) 연구진은 2020년 10월부터 미국 일리노이와 텍사스주의 저소득층 1,000명에게 매달 1,000달러(한화 약 140만 원)를 조건 없이 지급했습니다. 동시에 비교군 2,000명에게는 월 50달러만 제공하며 3년간 효과를 비교했습니다.

결과는 흥미롭지만 다소 충격적이었습니다. 기본소득을 받은 실험군은 연간 총소득이 약 2,000달러 줄었고, 노동시장 참여율은 3.9%포인트 하락했습니다. 근로 시간이 주당 1~2시간 줄었으며, 배우자 역시 같은 패턴을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생활 안정 자금을 받으면 더 나은 일자리를 탐색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오히려 노동 의욕이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입니다.

물론 여유 시간은 크게 늘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교육·재취업·기술훈련 등 생산적 활동에 투자하지 않았고, 고용의 질이나 장기적인 생산성 개선으로 이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연구진은 이를 두고 “기본소득이 단기적 생활 안정에는 분명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 노동시장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한계를 보여준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서울시 ‘디딤돌 소득’: 소비와 정신건강 개선, 그러나 고용 효과는 제한적

한국에서도 유사한 실험이 진행된 바 있습니다. 서울시가 추진한 ‘디딤돌 소득’ 시범사업이 그 사례입니다. 이 사업은 **기준 중위소득 85% 이하 가구(재산 3억2,600만 원 이하)**를 대상으로 부족한 소득을 보조해 주는 제도입니다.

서울대 이정민 교수 연구팀이 발표한 중간 분석 결과에 따르면, 가계 총소득과 소비 지출은 증가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또한 소득 안정이 정신건강 지표 개선으로 이어졌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생활비 부담이 줄자 우울감이나 불안감이 완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고용 효과는 오히려 제한적이었습니다. 지원을 받은 가구의 노동소득 증가율은 낮아졌고, 새로운 취업으로 연결되는 비율도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즉, 미국의 실험과 마찬가지로 소득 보조가 즉각적인 생활 안정에는 기여했지만, 노동시장 연계 효과는 크지 않았다는 결론입니다.


파키스탄 실험: “경제적 이익은 있었지만 체감 못 해”

흥미로운 또 다른 사례는 파키스탄에서 진행된 현금 지원 연구입니다. 임란 라술(University College London) 교수 연구진은 파키스탄 펀자브 지역 농촌의 1만 5,000 가구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일부 가구에는 약 86만 원 상당의 자산을 일회성으로 지급했고, 다른 그룹에는 동일 금액의 현금을 나눠주었습니다.

실험 결과 수혜 가구는 경제적 이익을 얻었고 마을 내 불평등도 완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민들은 체감 효과를 크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소득과 재산은 늘었지만, 재분배에 대한 태도나 정치적 성향, 사회적 인식은 거의 변화하지 않은 것입니다. 연구진은 “빈곤 완화 정책이 경제 현실은 바꿀 수 있어도, 사회적 인식 전환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설명했습니다.


현금성 복지의 빛과 그림자

이 일련의 실험들은 공통된 메시지를 던집니다.

  1. 긍정적 효과
    • 소득 안정 및 소비 확대
    • 단기적 빈곤 완화
    • 정신건강 개선 및 사회 안전망 강화
  2. 한계와 부작용
    • 노동시장 참여율 감소
    • 근로 의욕 저하
    • 고용 구조 개선 효과 미비
    • 사회적 인식 변화는 미약

즉, 현금성 복지는 즉각적이고 단기적인 효과는 뛰어나지만, 장기적인 노동시장 개선이나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점이 확인된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제언: 맞춤형 설계와 다층적 안전망 필요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현금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라고 강조합니다. 단순히 돈을 나눠주기보다는 교육, 재취업 훈련, 보육, 의료 지원 등 다층적 안전망과 결합할 때 효과가 커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국가의 재정 여건과 사회적 합의 수준을 고려한 맞춤형 설계가 필수적입니다. 한정된 재원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정책의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수용성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기본소득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매력적인 대안처럼 보이지만, 실제 실험 결과는 우리가 기대한 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노동시장 참여 감소, 고용 질 개선 부재라는 부작용은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소비 확대, 정신건강 개선, 불평등 완화라는 긍정적 효과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의 논의는 “기본소득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이분법을 넘어서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설계하고, 어떤 제도와 결합해 지속 가능한 복지 모델로 발전시킬 것인가입니다. 현금성 복지는 분명 ‘첫걸음’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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