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평등을 향한 새 정부의 과제: 후퇴에서 전진으로
지난 3년간의 여성 정책은 많은 이들에게 실망과 좌절을 안겨줬습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세우며 여성 정책의 존재 이유 자체를 흔들었고, 실제로 임기 내내 그 기조를 밀어붙였습니다. 성 평등 정책은 사실상 정지 상태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정권이 교체되고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한 지금, 많은 이들이 다시 한번 희망의 끈을 잡아보려 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정부는 다를 수 있을까요? 지금 필요한 것은 실망을 딛고, 후퇴한 정책을 복원하고 나아가야 할 분명한 방향성입니다.
대통령의 국정철학이 성 평등을 결정한다
여성 정책은 언제나 대통령의 의지와 정권의 기조에 좌우돼 왔습니다. 호주제 폐지, 여성부 출범, 양성평등기본법 제정 등 시대를 바꾼 결정들은 모두 당시 대통령의 강력한 관심과 철학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러나 지난 정부는 그런 철학을 거의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여성가족부는 장관 임명이 지연되거나 아예 공석으로 방치됐고, 내부 업무는 폐지를 위한 명분 쌓기로 전락했습니다.
성 평등을 향한 정책은 어떤 시대적 분위기나 정치적 타협보다도 대통령의 가치관과 철학에서 출발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선거 기간 중 “여전히 구조적 성차별이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여성가족부 존속과 성 평등 거버넌스 강화를 약속했습니다. 그 발언에 많은 여성 유권자들이 기대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취임 초기, 대통령실 수석이나 국정기획위원회에서조차 여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은 벌써 실망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여성의 ‘대표성’ 없는 평등은 껍데기일 뿐
정치, 경제, 공공행정 등 모든 분야에서 성 평등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여성의 대표성 부족입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24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정치 분야에서 146개국 중 72위,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03위에 불과합니다. 22대 국회에서 여성 의원 비율은 고작 20.3%,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권입니다.
정부 내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023년 기준 여성 장관 비율은 15.7%, 차관은 13.8%에 머물렀고, 중앙부처 여성 고위 공무원 비율은 11.7%에 불과했습니다. 새 정부는 이 구도를 과감하게 뒤집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 평등 내각을 꾸리고, 장관과 수석비서관, 국정자문단 등 권한 있는 자리에서부터 여성을 임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구조적 차별을 바로잡는 첫걸음입니다.
여성의 경영 참여 확대, '사외이사 1명' 구색만으로는 부족
2022년 도입된 여성 이사 의무화 제도는 분명 한 걸음의 전진이었습니다. 자산총액 2조 원 이상인 상장사는 특정 성으로만 이사회를 구성할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여성 이사 선임이 의무화됐고, 실제로 여성 등기임원 수는 2배로 늘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계가 뚜렷합니다.
사외이사 비율은 급격히 늘었지만, 실질적인 권한과 영향력을 갖는 사내이사는 거의 제자리입니다. 2024년 기준 사내 여성 이사는 겨우 2.7%에 불과합니다. ‘겉치레용’ 사외이사 임명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정부는 자산 기준을 낮추거나, 일정 비율 이상 여성 이사를 선임하도록 구체적인 규정을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기업공시제도를 활용한 경영 투명성 제고도 중요합니다.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여성 인재 육성 현황, 임금 격차, 관리직 비율 등을 기업들이 정기적으로 공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투자자와 국민이 기업의 성 평등 지표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세제 혜택이나 공공입찰 우선권 등 인센티브도 마련돼야 합니다.
공공기관의 모순: 민간보다 더 보수적인 현실
놀랍게도, 여성의 대표성 부족은 공공기관에서 더욱 심각합니다. 리더스 인덱스 조사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공공기관 상임 여성 임원은 단 5.1%에 불과합니다. 민간기업보다도 훨씬 뒤처져 있는 수치입니다. 게다가 상임·비상임 임원을 구분한 통계조차 정부가 아닌 민간 조사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공공기관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공공 부문에 여성 이사 1인 이상 의무화를 법제화하고, 공공기관 경영평가 지표에 여성 임원 비율을 정량 지표로 명확히 반영하는 등의 조치가 시급합니다. 단순히 평등지표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지표가 실질적 결과를 유도하도록 해야 합니다.
젠더 갈등이 아닌, 젠더 통합의 정치로 나아가야
윤석열 정부의 가장 큰 오류 중 하나는 ‘젠더 갈라치기’였습니다. 특정 세대의 표를 얻기 위해 성별 갈등을 자극하고,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세워 갈등을 구조화한 정책은 사회 전반에 불필요한 대립을 불러왔습니다.
이제는 그런 정치를 끝내야 할 때입니다. 성 평등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존중받는 구조를 만들고, 누구도 성별 때문에 기회에서 배제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인지 감수성을 갖춘 내각, 젠더 통합을 위한 실효성 있는 정책, 대표성 확대를 위한 구조 개선이 동시에 이뤄져야 진정한 변화가 가능합니다.
퇴행에서 전환으로, 그리고 도약으로
이제 새 정부의 시간입니다. 과거 3년간의 여성 정책이 정체되고 후퇴한 시기였다면, 지금은 그 흐름을 되돌리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구체적인 실행 계획 없이 구호만 외치는 정책이 아닌, 비전이 뚜렷하고 실행력이 있는 성 평등 전략이 필요합니다.
성 평등은 사회 발전의 필수 조건입니다. 젠더 통합은 단지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한 길입니다. 이번 정부가 그 변화를 주도할 수 있기를, 그리고 미래 세대가 오늘을 되돌아보며 ‘그때부터 성 평등이 진정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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