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관람기] 불투명한 미로 속에서 만난 찰나의 환영(幻影) — 천안 선재갤러리 정미정 개인전 《파편적 기억》 관람기
흩어진 조각들을 따라기억의 미로에 들어서다
천안의 차분한 골목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선재갤러리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정적과 함께 묵직한 몰입감이 감돌았다. 흰 벽면을 따라 조용히 숨 쉬고 있는 작품들은 정미정 작가의 개인전 《파편적 기억》을 구성하는 조각들이었다.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연 얼마나 진실할까. 지나간 날들의 사건과 공간, 그 안에서 느꼈던 감정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닳고 마모된다.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채 캔버스 구석구석에 엉겨 붙은 무수한 잔상들. 전시장 입구에서 마주한 작가의 작품들은 완성된 형태의 거대한 서사가 아니라, 작가의 내면에 파편처럼 산산이 부서져 있던 불확실한 기억과 주관적 경험들이 정성스럽게 수집되어 비로소 시각화된 산물처럼 느껴졌다.
작가는 자신이 지나온 삶의 궤적 안에서 마주했던 수많은 경험의 순간들을 결코 선명한 언어로 강요하지 않는다. 화면 속 조형 요소들은 형태를 갖추고 있는 듯하면서도 이내 경계가 허물어지고, 강렬하면서도 절제된 색채의 대비는 명확한 형태를 지우며 묘한 불투명함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앨범 속 사진이 빛에 바래 흐릿해진 모습과도 닮아 있었고, 꿈속에서 보았던 어떤 공간을 깨어나서 복원해 보려 애쓸 때 느껴지는 아득함과도 닮아 있었다.
공간의 다층적 재구성: 《Place: 장소》 연작을 거닐며
전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Place: 장소》 연작들은 관람객에게 매우 독특하고 깊이 있는 조형적 담론을 제시한다. 여러 점으로 구성된 이 연작은 언뜻 보기에 매우 유사한 구조와 화면 구도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관람자의 시선이 캔버스 하나하나에 깊숙이 닿는 순간, 그 비슷함은 이내 경이로운 차이점과 변주로 모습을 바꾼다.
작가는 기억 속에 각인된 특정 '공간'을 단 하나의 완벽한 국면으로 정의하기를 거부한 듯하다. 동일하거나 유사한 프레임 안에서 피어나는 완전히 다른 색조, 질감의 물리적 겹침, 그리고 필선의 굵기와 속도감. 이것은 동일한 장소라 할지라도 그것을 떠올리는 순간의 감정 상태, 시간의 깊이, 혹은 무의식적 끌림에 따라 작가의 기억 속에서 매번 전혀 다른 공간으로 재탄생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어떤 《Place》는 짙은 음영과 투박한 질감으로 덮여 있어 기억의 침묵과 쓸쓸함을 대변하는가 하면, 또 다른 《Place》는 맑고 투명하게 레이어가 스며들어 있어 가슴 한구석을 아련하게 만드는 온기를 머금고 있다. 하나의 공간이 작가의 주관적 내면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면서 얼마나 풍부하고 다채로운 시각 언어로 분열되고 확장될 수 있는지, 이 연작은 고스란히 보여준다.
비슷한 구도 속에서 수없이 새로 태어난 공간의 조각들을 하나씩 비교하며 감상하는 과정은, 마치 작가의 머릿속에 축적된 수많은 시공간의 층위(Layer)를 차곡차곡 탐색해 나가는 일종의 시각적 모험과도 같았다.
마음의 깊은 앙금으로 남은 작품: 《Remembrance, 기억-추억》
여러 작품들을 지나치며 발걸음이 한동안 멈춰 선 곳은 단연 《Remembrance, 기억-추억》 앞이었다. 전장의 《Place》 연작이 공간의 변주와 재구성이라는 조형적 시도에 집중했다면, 《Remembrance, 기억-추억》은 기억이라는 본질이 가진 정서적 울림을 극대화하여 전달하는 작품이었다. 이번 전시를 통틀어 가장 깊게 잔상이 남은 명작이라 단언할 수 있다.
이 작품의 화면 위에는 흐릿함과 명확함, 잊힘과 간직됨이라는 대립적인 요소들이 미묘한 균형을 이루며 혼재되어 있다.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아 올려지고 긁혀 나간 물감의 층위들은 지나간 시간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마음의 앙금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밀물처럼 밀려왔다 쓸려가는 추억의 물결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은 대형 화면의 경계선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단순히 작가의 그림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틈새로 자기 자신의 과거를 투영하게 만드는 강력한 끌림을 발휘한다. 작가가 담아낸 불완전한 추억의 조각은 내 안에 숨어 있던 아련하고 소중했던 순간들—어느 날의 노을, 누군가의 목소리, 따스했던 공간의 온도—을 일깨우는 통로가 된다.
《Remembrance, 기억-추억》이 주는 정서적 무게감과 아름다운 시각적 레이어는 전시장 조명 아래에서 유독 깊은 빛을 발하며 관람을 마친 후에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아른거리는 진한 여운을 남겨주었다.
파편을 줍는 여정을 마치며
정미정 작가의 《파편적 기억》전은 단순히 미학적인 관조를 넘어, 인간이라는 존재가 과거를 어떻게 간직하고 재구성하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는 전시였다. 작가는 자신이 지닌 주관적이고 불확실한 기억의 조각들을 숨기거나 미화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고, 캔버스라는 장을 통해 매력적이고 완성도 높은 조형 언어로 승화시켰다.
선재갤러리의 호젓함 속에서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단단하게 고정된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이 순간의 관람 경험마저도 언젠가는 가물거리는 잔상과 파편으로 남아, 시간이 흐른 뒤 나만의 또 다른 'Remembrance'로 다듬어질 것이다.
지쳐있는 일상 속에서 잠시 벗어나,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정갈하고 다채로운 울림에 몰입해 보고 싶다면 천안 선재갤러리에서 펼쳐진 정미정 작가의 개인전을 꼭 마주해 보기를 권한다. 흐릿해서 더욱 아름답고, 불완전해서 더욱 인간적인 기억의 잔상들이 오래도록 가슴을 채워줄 것이